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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제시대 가장 진보적이고 인텔리였던 여성의 끔찍한 최후..

통통이삼촌 2016. 10. 1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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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소녀티를 갓 벗은 동양 여성 한 명이 나타났다. 


사회과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스웨덴을 찾아간 21세의 조선 여성 최영숙이었다. 


스웨덴에는 아는 사람 한 명 없었고, 스웨덴어는 간단한 인사 한마디조차 할 줄 몰랐다. 

집안이 유학경비를 대줄 만큼 넉넉하지도 않았고, 장학금을 대줄 후원자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스톡홀름에 도착했을 때, 최영숙이 가진 것이라고는 사회주의 관련 서적 몇 권과 큼지막한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처음 스웨덴 땅을 밟았을 때, 나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해 어쩔 줄 몰랐습니다. 스웨덴의 풍경은 내가 어릴 때 지리를 배우며 상상하던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언어와 풍속이 너무 다르고 아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어찌 외롭고 쓸쓸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한 달 동안은 밤이나 낮이나 울기만 했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울기만 해서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겨우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톡홀름 인근 시골학교를 찾아가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개월 간 스웨덴어를 배워가지고 가을 학기에 스톡홀름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서전 대학생 생활’, ‘삼천리’, 1932년 1월)


 최영숙은 시골학교 청강생 신분으로 낮에는 스웨덴어를 공부하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자수를 놓았다.



Gustaf VI Adolf av Sverige som kronprins.jpg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 능통하면서 스웨덴어까지 할 줄 아는 최영숙은 학구열이 왕성한 스웨덴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황태자 도서관에서 일한 덕분에 최영숙은 스웨덴 지식인들과도 폭넓게 사귈 수 있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31년 11월,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귀국길에는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이집트, 인도, 베트남 등 세계 20여 개국을 여행했다. 인도에서는 4개월간 머물면서 마하트마 간디, 나이두 같은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귀국을 위한 여행 중, 인도에서 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최영숙은 이 모든 풍요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사회과학을 공부해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은 까닭이었다.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했고, 영어·독일어·스웨덴어·중국어·일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고, 

국제감각까지 갖춘 최영숙은 인재가 부족한 조선에 보석 같은 존재였다. 


어떤 직장이고 최영숙이 손을 내밀면 잡아줘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어느 직장도 최영숙을 받아주지 않았다. 



***




“조선사회는 아직 인텔리 여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국어 교수 노릇을 하려고 애썼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어느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려다가 문부성에서 교원면허를 내주지 않아 그것도 불가능했습니다.


 나중에 어떤 신문사의 여기자로 입사하려고 운동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할 수 없이 사람의 왕래가 많은 서대문 밖 교남동 큰 거리에 자그마한 점포를 빌려서 장사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배추, 감자, 마른미역줄기, 미나리, 콩나물을 만지는 것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양의 일상직업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자본이 없는 일개 구멍가게로 어떻게 한 집안 생활비가 나오리까. 오직 최영숙 양은 살을 깎는 듯한 경제적 곤란을 당하고 지냈을 뿐입니다.


(‘서전 경제학사 최영숙 양 일대기’, ‘삼천리’, 1932년 5월)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일념으로

 스웨덴에서 5년 동안이나 공부하고 돌아온 최영숙에게

 고국이 허락한 일자리는 고작 ‘콩나물 장수’였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활이 날로 어려워지자 결혼반지까지 금은방에 내다팔았다. 


온 집안의 고무신을 모조리 모아다가 전당포에 잡혀서 끼니 때울 양식을 구한 적도 있었다. 


그나마 오래 할 수도 없었다. 


귀국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2년 4월, 최영숙은 실신해 동대문부인병원에 입원했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으며 5개월을 지낸 데다 임신 상태였던 그녀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인도 청년 ‘미스터 로(Mr. Row)’와의 관계가 조선 사회를 뒤집은 것은 그때였다. 


산모의 생명이라도 구하고자 낙태수술을 받았지만 병세는 나빠져만 갔다. 

그녀는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었고,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홍파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4월23일 오전 11시, 최영숙은 2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



“그의 집은 빈한하고 당장 매장할 준비조차 없다. 여사의 평생 동지였던 임효정 여사가 장례비 일체를 부담하는 형편이다. 육십 된 노부모가 망극하여 통곡하는 광경은 실로 쓸쓸하다.”(조선일보, 1932년 4월25일)


4월 25일,


최영숙은 영면할 묏자리 한 평 구하지 못해 홍제원 화장장에서 재가 되었다.



***


그녀가 사망한 후 3년이 지난 1935년, 스톡홀름대학 자연과학부 학장 스텐 베르크만 박사가 동식물 표본 수집차 조선을 방문했을 때 ‘미스 최’의 안부를 물었다,

“베르크만 박사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미스 최’를 안다고 했다. ‘미스 최’는 연전에 스웨덴에서 경제학 학사학위까지 받아가지고 귀국했지만 불우한 날을 보내다가 요절한 최영숙씨를 말한다. 기자가 그는 죽었다고 말하니 대단히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스 최는 스톡홀름 박물관에서 수삼차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를 통해 조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미스 최는 황태자 도서실에서 동양 서류 정리 업무를 얼마간 보았는데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조선일보’, 1935년 2월23일)



***



최영숙에게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만일 그가 스웨덴에 눌러앉았다면,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한평생 공주처럼 살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인도에 남았다면,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아름답게 늙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최영숙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에 돌아왔고, 


27세 꽃다운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최영숙이 조선을 위해 일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을 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영숙이 홍제원 화장장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이후에야, 사람들은 그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진 관심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요절한 인텔리 여성을 향한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단지, 스웨덴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 여성이 무슨 까닭으로 

인도에서 ‘혼혈 사생아’를 임신하고 돌아왔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도, 마찬가지인 이유에서였다.



- 최영숙이 세상을 떠난 지 며칠 후, 미스터 로로부터 여비를 보내니 인도로 돌아오라는 편지가 왔다.



***



최영숙에게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만일 그녀가 스웨덴에 눌러앉았다면,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한평생 공주처럼 살았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인도에 남았다면,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아름답게 늙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최영숙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에 돌아왔고, 


27세 꽃다운 나이에 비참하게 죽었다.





출처 : 뉴빵카페  
글쓴이 : 뉴여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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