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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975년 박동명 사건 ( 펌 )

통통이삼촌 2015. 1. 21. 21:50

1975년 전국을 엽색의 용광로로 펄펄 끓게 했던 박동명 사건은
우리 사회의 그늘 밑에 이렇게 독버섯처럼 기생하는
섹스의 마각이 도사리고 있음을 명약관화하게 보여준
연예계 뿐 아니라 전 사회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다.

그 당시 연예계는 박동명 사건 리스트로 쑥대밭이 되었다.
희대의 엽색행각을 벌여온 박동명은 그 유명한 감람나무의 박태선 장로의 아들로
영화배우를 비롯해 탤런트, 가수. CF 모델 등 닥치는 대로 삼킨 한국판 카사노바의 화신이었다.
그와 놀아났다는 연예계 여인들의 명단이
누구에 의해 밝혀졌는지 몰라도 괴문서로 난무하여
당시 신문과 주간지는 물론 잡지에까지 요란하게 대서특필되어
전국을 섹스의 파문으로 얼룩지게 하였다.

영화계에서는 35명의 명단 중 일단 구설수에 오른 여배우를 징계하려고 하였으나
근거없는 유언비어에다가 본인의 완강한 사실무근 주장으로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누군가의 음해인지 아세아의 톱스타 김지미가
괴문서의 명단에 들어있어 박동명 사건은 점입가경이 되었다.

당시 김지미는 영화인협회 부이사장으로 있었다.
김지미는 영화인협회에 출두하여
너무나도 기가 막혀 탄식을 하면서
내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 망나니와 놀아나겠느냐고
자조적으로 푸념을 하기도 하엿다.

소위 괴문서의 명단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그 명단의 당사자는 결백을 주장하는가 하면,
거기에 누락된 여인들은 인기를 한탄하면서 오명도 좋으니
제발 끼어있기만 있었으면 하는 현시욕을 과시하기도 했다.

어떻든 박동명 사건은 수많은 여자 연예인의 돈과 인기라는 허방다리를 단적으로 증명해준
우리 사회의 병폐의 실상을 보여준 부도덕의 단면도이기도 했다.

막 톱스타로 뛰어오르던 양정화는 박동명 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
자신과 박동명이 함께 찍은 사진을 게재한 중앙일보를 거액의 위자료 청구와 함께
명예훼손죄로 고발하기도 하였고,
명보극장 사장 아들에게 시집간 최정민은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음독하였다.
그 후 끝내는 이혼의 파경을 맞기도 하였다.

이럴 즈음 김수용 감독의 {내일은 진실}에 출연중이던 고은아와 윤정희는
이런 진흙탕 사건에 전혀 상관없이
독야청청 연기에 몰두하여 칭송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 즈음 김영애는 간통죄로 서대문 구치소에 있었다.
유부남과의 진정한 사랑의 확인을 위해 쇠고랑을 찬 김영애의 기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용감한 사랑의 순애에 동정어린 말을 하였다.
"" 얼마나 순수한가1 "
" 저것들 보다 ( 박동명 사건에 연루된 여자들 ) 백배 깨끗해 "
" 김영애의 반쪽도 되지못한 것들"
온통 김영애를 거룩하게 표현하면서
박동명 사건을 힐난하는 우회적인 비아냥이었다.

7공자로 이름난 이른바 재벌 2세와 전직 고관대작의 아들 등으로 조직된 이들은
자기의 부와 허영심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자 연예인을 사냥하는 장치를 했고
심지어는 해결사를 시켜 납치하는 수법을 쓰기도 했다.

여자 연예인의 약점을 이용하여 수많은 섹스행각을 벌여온 이들은
이미 개과천선한 사람도 있고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사람도 있다는 후문이다.
확실히 박동명 사건은 영화 속의 NG 보다도 더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섹스 리얼리즘의 극치엿다.

아름다워야 할 섹스가 한낱 출세의 도구나 인기의 대상이 되었던
지난 날의 요란한 파문이 있었기에 오늘을 더욱 경계시켜주는
온고지신이 되고있다.


출처 : 1960년대 스타들
글쓴이 : 성위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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